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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수동태는 영어권에서도 찬밥신세(9)

우리말과 글은 본디 능동적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행위자의 관점에서 표현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가 맞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되어진다.”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죠. 심지어 공부를 많이 하고, 똑똑한 분들이 TV나 라디오 토론프로그램에 나와 “그 문제에 대해선 이렇게 생각되어집니다.”라고 말합니다. 영어로 치자면 수동태인 셈입니다. 너도나도 그렇게 씁니다. 사례가 하도 많아서 문제 삼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입니다. 그렇게 쓰면 좀 멋있게 보인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실은 영어에서도 가급적 수동태 문장을 사용하지 말라고 전문가들은 권합니다.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영어에서 수동태를 사용하는 것은 주로 ▲감정이나 상태를 나타낼 때 ▲행위의 대상이 강조될 때 ▲행위의 주체가 불분명할 때 ▲언론 문장에서 객관적 표현을 할 때입니다. 그런데 많은 언론사의 스타일 가이드북에서부터 유명한 작문 서적에 이르기까지 수동태 문장을 쓰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문장에서 ‘누가 무엇을 했는가’라는 정보가 누락되기 때문입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재임 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re is no doubt that civilians were killed that shouldn’t have been.”

직역하면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되었던 민간인들이 죽임을 당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오바마는 민간인들을 죽인 주체,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 ‘드론’의 존재를 숨기고 싶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계 미국인 판사에 대한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논란이 일자 해당 판사의 공정성에 “Questions were raised.”라고 했습니다. “문제가 제기된 바 있다.”라고 말한 거죠. 그런데 누가 문제를 제기했던 걸까요? 다름 아닌 트럼프 본인이었습니다. 그걸 감춘 채 객관적인 상황인 것처럼 말한 겁니다. 영어권에서도 수동태를 경계하는 이유입니다.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이란 글을 보면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한국어는 ‘우리는 그 소식을 듣고 놀랐다’라고 사람이 느끼는 놀라움의 감정을 자동사로 나타내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영어는 ‘The news surprise us.’처럼 타동사가 기본입니다.”

 

영어에선 나의 감정보다 무엇이 나를 놀라게 했는지, 슬프게 했는지, 즐겁게 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런 언어를 무비판적으로 우리말과 글에 접목시키다보니 ‘생각되어진다’와 같은 이중국적의 표현까지 유행하게 된 겁니다.

 

디즈니 영화 <겨울왕국>의 OST 중 한 부분을 들어볼까요?

 Let the storm rage on
 The cold never bothered me anyway 
 It’s funny how some distance makes everything seem small
 And the fears that once controlled me can’t get to me at all

영화 주인공 엘사의 목소리를 연기했던 우리 뮤지컬배우 박혜나는 수동태로 된 <겨울왕국> OST를 이렇게 멋지게 바꿔 불렀습니다. 엘사의 의지가 더 ‘찐’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폭풍 몰아쳐도
추위 따윈 두렵지 않다네
거리를 두고 보면 모든 게 작아 보여
나를 두렵게 했던 것들 이젠 겁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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